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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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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ape me
날짜
05-08-01
등록자     바이러스 조회수 1439
작가 및
추천사이트
    글쟁25 추천수 0
     
 

그 날은 비가 왔었다. 정말 지독한 비였다. 우산을 받쳐들

어도 거센 빗방울이 우산 깃을 뚫고 들어올 정도였다. 그

폭우 속을, 나는 우산도 없이 걸었다. 죽여주는 거리였다.

여기저기서 택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에 얻어맞으며

걷는 사람들은 모두 지쳐 보였다. 아이도, 어른도. 그들은

우습게도 비를 맞지 않으려고 걸음을 더 빨리 하고 있었다.

이미 온통 젖어서 질퍽거리는 몰골로 말이다. 나는 특별한

목적도 없이 그런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멍청하게 걸었다. 지

루한 짓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엿듣게 되

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특별히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아

니었다. 병신 같은 꼴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조

잡한 핸드폰들을 손에 들고 자신들의 꼴보다 더 병신 같은

이야기를 지껄여댔다. 그게 어떤 이야기였냐 하면, 그들은

주로 자신의 삶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머니와 싸웠다. 회사

동료와 성격이 맞지 않아 짜증이 난다. 저번에 읽은 책은

참 더럽게 재미없었다. 애인하고 헤어졌는데 죽고 싶다. 친

구 축의금을 두둑하게 넣었는데 실수한 것 같다. 등등. 그

런 어처구니없는 화제에 맞장구를 치고 일일이 대답해 주는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한가한 녀석일까. 속으로 그런 생각

을 하며 건성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내 주의를 확 끄는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

다. 조용히 울리는 그 목소리는 약간 떨렸고, 두려움이 묻

어났다. 나는 금방 목소리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내 옆에서 걷고 있었으니까. 스무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여자였다. 깊고 탁한 눈동자를 지닌 그녀에겐

그 눈동자와 함께 사람의 시선을 끌만한 매력이 넘쳐흘렀

다. 멋진 여자였다. 그녀 역시 나처럼 우산을 들고 있지 않

았다. 그랬기에 나는 그녀가 우는 건지 아니면 울먹이는 건

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빗방울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하여간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핸드폰 너머의 누군가에게 이야

기를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여보세요, 나야. 난데. 여보

세요. 여보세요.

그 몽롱한 목소리의 여운을 좇고 있는데, 난데없이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당장 이리로 와서 날 죽여 줘.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 직전

에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말이지. 그녀는 다시 말했다.

알아. 그래. 안다고 했지. 봐. 들어. 아니. 그런 건 애새끼

들이나 하는 상상이야. 그런 죽음은 없어. 봐. 들어 보라

고. 맞아. 맞다니까. 진심이야. 네가 날 죽이지 않으면 난

자살할 거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미친 듯이 바닥에 처박

히는 빗소리에 섞여서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기괴하게

들렸다. 이런 골치 아픈 밤에 대체 누가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려 하겠는가. 몇 번 더 여보세요를 연발하던 그녀가

마침내 화를 내며 핸드폰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것까지 보고

나는 그녀를 외면하기로 했다. 그냥 아무 일도 아니겠지.

갑자기 변덕스러운 마음에 뜻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걸지도 몰라. 그게 아니더라도, 그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녀가 자살을 하든 말든 나로서는 전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의 행동을 합

리화시켰다. 그런 내가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다른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

는 다급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던 거 알아요. 여보세요. 잠깐. 거기 서요. 잠깐이면 돼.

이봐요. 나는 이어서 들리는 말들을 모두 무시하고 앞으로

걸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내 뒤를 따라왔다. 여보세요. 이

봐요. 잠깐만 거기 서봐요. 이렇게 젊고 예쁜 여자가 엿 같

은 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부탁을 하면 보통은 들어줘야 하

는 거 아니에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 재미있었

다. 어, 이제 멈췄네. 의외라는 표정으로 깊고 탁한 눈동자

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공허한 눈동자. 부탁하지마.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 먼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별로 놀

라는 눈치도 아니었다. 뭐야 역시 다 엿들었잖아. 조그맣게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아저씨 몇 살이에요? 위아래로 유

심히 나를 훑어보던 그녀가 대뜸 묻는다. 그러는 너는 몇

살이지? 나는 그녀의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그녀는

잠깐 뜸을 들였다. 먼저 물었으니 먼저 대답하세요라는 식

의 유치한 반격을 예상했으나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음.

열 여덟이요. 그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녀는 생각보

다 어렸다. 아직 새카맣게 어린 나이가 아닌가. 그런 주제

에 자살이라니. 나는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음. 서른 다

섯. 나는 서른 한 살이었지만 실제의 내 나이보다 일부러

더 높게 불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가 내게서 어떤 위압

감을 느끼길 바랬다. 기왕이면 어디론가 사라져주면 더 좋

고. 하지만 그녀는 별 감흥이 없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

다. 그럼 나랑 같이 가요. 가다니 어디를? 저기. 저기? 저

기.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곳은 멀지 않은 곳에 위

치한 러브호텔이었다. 나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잠시

동안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열 여덟씩이나 처먹어놓고

설마 러브호텔이 그냥 잠만 자는 곳인 줄 아는 건 아니겠

지. 그녀는 가만히 서서 예의 그 탁한 눈으로 내 눈을 똑바

로 쳐다보았다. 건방진 태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이

미 그녀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슬

픔이 그녀에게서 전해져왔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강렬한 말투였고, 명령조였으며, 반말이었다.

나를- 강간해.



비는 그녀와 내가 러브호텔 카운터에서 방을 잡고 열쇠를

받은 뒤 2층 계단에 올라설 때까지도 미친놈처럼 쏟아져 내

렸다. 염병할, 지랄 맞게도 내리는군. 나는 투덜거리며 열

쇠구멍에 열쇠를 쑤셔 넣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 그렇게 말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가 마음을 돌렸으면 했다. 그러나 한편

으로는, 나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욕망이 스멀거리며 치솟

고 있는 걸 느끼고 당황했다. 비에 젖어 달라붙은 옷 너머

로 보이는 그녀의 봉긋한 가슴에 자꾸만 눈이 갔다. 그녀는

내 시선을 의식하는지 양팔로 가슴을 안았다. 오히려 그게

더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산산이 부셔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에 비하면 나는 형편없는 개새끼였

다. 이게 얼마나 역겨운 결합인가. 문을 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방에 들어섰다. 그곳은 불

을 켜도 어두웠다. 붉게 물든 조명이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

다. 나는 젖은 머리를 털고 옷을 벗어 던진 후에 욕실로 들

어가 샤워를 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

저었다. 대부분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샤워는 오래 걸렸

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욕실에 그냥 있기를 바랬는지도 모

른다. 그러나 아무튼 샤워는 끝났고, 다음은 그녀가 욕실로

들어갈 차례였기에 난 침대 옆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

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격렬

한 울음이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서 숨이 막힐 정도로 울

었다. 도대체 이게 다 뭔가? 나는 우울했다. 나는 아주 우

울했다. 이게 뭐든 다 때려치우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녀를 그녀의 집으로 보내주고 싶었다. 비가 그치고 날이

밝으면, 그녀가 오늘의 일을 회상하며 그건 참 엿 같은 일

이었다고, 그만두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길 소망했다.

터무니없이 유치하고 간절한 소망이었다. 바깥에서 내리고

있는 비처럼 내 눈에서도 미친 듯이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간이 냉장고에서 와인 병을 꺼내 잔도 없이 그대로 입에 물

었다. 그러자 차츰 격했던 감정이 누그러들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욕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세요. 여보세요. 나 지금 러브호텔에 와 있어. 아냐. 아냐,

혼자 있는 거 아냐. 그래. 맞아. 아니, 싫어. 그래. 직접

와서 날 죽여.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강간당하고 길바닥에 내버려 질 테니까. 웃기지 마. 그래.

아니. 틀렸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한참의 침묵 끝에 작은 흐느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고개

를 떨구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샤워를 마치고 얇은 타월

한 장만 몸에 걸친 모습으로 내 옆에 서 있다는 걸 눈치채

지 못했다. 침대는 안 돼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타월의 이음새를 양손으로 꼭 쥐고 말했다. 나는 강간당하

는 거니까, 바닥에서 해요. 타월도 아저씨가 강제로 벗겨내

야 해요. 자. 어서.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한없이 공

허한, 처절한, 그 두 개의 눈동자를 닫았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소파에서 일어나 와인 병을 집어던지고 거칠게 그

녀를 쓰러뜨렸다. 무릎으로 그녀의 다리를 짓누르고, 타월

을 벗겨내고, 휘젓는 그녀의 양팔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두

기엔 너무 늦었어. 넌 돌아갈 수 없어. 넌 그만둘 수 없어.

너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나는 마음껏 그녀의 몸

을 유린했다. 때리고, 부수고, 박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그녀를 보내버렸다. 더불어 나 자신도 그렇게

맞고, 부서지고, 박살나고,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자신을

보냈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런 의미

도 없었다.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난 거다. 그래.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난 거다. 그리고 아무도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조차도.



그녀는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고, 체크아웃을 하고, 밖

으로 나갔다. 나는 아직 방에 남아있었다. 그녀가 내지른

처참한 비명이 아직도 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역겨운 살

냄새가 곳곳에서 풍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바닥에

굴러다니는 와인 병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일

이 있었더라. 바깥으로 보이는 세상에는 아직도 비가 내렸

다. 그치지 않을 것 같다. 가만히 몸을 일으켜서 문을 잡는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해냈다. 하지만 나

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미성년자를 강간했다.

나는 나쁜 자식인가? 나는 비난받아야 하는가? 그런 건 아

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강간했

고, 그녀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나에게 강간당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비는 내리고, 그녀는 가고, 나는 여기에 있

다. 그 뿐이다.

그래, 그 뿐이다.



* 출처 : 글쟁25 - 바이러스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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