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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인암
날짜
05-07-20
등록자     사인암 조회수 3268
작가 및
추천사이트
    http://yoon2y.com.ne.kr 추천수 0
     
 

卓爾弗群 確乎不拔 獨立不懼 遯世無憫
(탁이불군 확이불발 독립불구 돈세무민)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 것이 아니며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 홀로서도 두려운 것이 없고 세상에 은둔하여도 근심함이 없다.)

해석이 더 어렵다. ´탁월하여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없도다. 확실하게 더 이상 뽑아낼 수 없을 만큼 우뚝하도다.´ 정도로 해석 해봄이 어떨지......



이른 아침 느티나무 아래로 의자를 끌어 내놓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외지인 듯 싶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나 아이들은 이미 물속에 들어 있다. 도락산 찾아 들다가 우연히 들른 사인암의 경관은 가이 경탄을 자아낼 만하다. 자색(紫色)의 수직벽에 가로 세로로 불규칙한 절리가 비구상의 화폭을 펼쳐 주는데, 거기에 어울어진 노송의 자태가 또한 도도하다.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 솟아 오르고, 절벽 아래 흘러가는 남조천의 수면은 거울되어 비친다.

사인암은 우탁(1263~1343년)이 사인(舍人:임금 가까이 모시던 정4품) 벼슬에 있을 때 청유(淸遊: 속진을 떠나 명산에 휴양)하던 곳이라 해서, 조선 성종 때의 단양군수 이제광이 사인암이라 명명했다 한다. 암벽에는 우탁의 친필 감회가 새겨지고, 시비에는 우탁의 탄로가(嘆老歌) 2수가 전한다.



한손에 막대잡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은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청산에 눈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없네

저근 듯 빌어다가 머리우에 불리우고자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사인암을 끼고 굽이치는 골짜기를 운선9곡(雲仙九谷)이라 한다. 신선이 노닐던 계곡에 유유자적하던 우탁은 영겁의 세월에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사인암의 절리를 보며 인생무상의 감회에 젖어들었는가 보다. 세월 속에 한낱 늙은이로 변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찌 서럽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자연의 섭리이니 어찌하겠는가. 우탁이 떠난 지 반세기를 훌쩍 넘겼는데, 그 때 우탁이 바라보던 사인암의 절리는 얼마나 변모한 것인가........

사인암 가까이에는 단양8경 중에서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을 잇는 삼선9곡(三仙九谷) 또한 절경이다. 퇴계 이황도 ´속세를 떠난 듯한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 극찬했다 한다. 상선암은 기암괴석에 암반을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 울창한 숲이 어울려 수려한 계곡미를 자랑하고, 경천벽, 와룡암, 차일암, 일사대, 명경담 등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중선암은 울창한 숲속에 쌍룡폭포, 명경대, 옥렴대 등 바위를 중심으로 맑은 물이 절경을 이룬다. 하선암은 100평 넓이의 암반가를 흘러가는 맑은 계류가 거울같은 수면을 드리운다.









부석사(浮石寺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어디 한량없는 목숨이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이 사람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빡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은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정일근



충북 단양에서 경북 영주땅은 먼곳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단양 사인암에서 부석사까지는 승용차로 50여분의 거리에 있다.

국내 최장인 죽령터널은 4.6km, 고속도로인데도 가도가도 끝이 없다. 터널 끝난 지점이 풍기 IC, 톨게이트 나서자 이정표가 부석사까지 한치 오차없이 인도한다.

유홍준씨는 남한의 5대명찰(名刹)을 어떤이의 말을 인용하여 논하면서 부석사에 대하여 ´몇 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이다.´라고 쓰고 있다.



내가 부석사를 처음 찾았던 것은 10여년도 넘은 때다. TV를 보다가 소백산의 눈쌓인 정경에 반하여 그날로 배낭을 꾸려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풍기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마침 봄방학 중이어서 쉽게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원래 눈은 1월 보다는 2월이 더 많이 내리는 것 같다. 내 섣부른 판단인지는 몰라도 이제 봄이 다가오고 있으니 만물을 소생시킬 생명수를 미리미리 준비하기 위한 자연의 섭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눈 쌓인 설경을 보기 위해서는 2월을 기다리곤 한다.



풍기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숙소를 정하기는 이른 시각이고, 마땅히 할 일이 없이 빈둥 대다가, 풍기에서 출발하는 부석사행 버스를 탄 것이 부석사를 만나게 된 인연이었다. 부석사 이름은 들었지만 그렇게 유명한 절인줄은 몰랐다. 솔직히 말한다면 유홍준씨의 책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부석사에 대한 느낌이 크게 와 닿은 것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내 고향인 충남 서산에도 부석이란 마을에 부석사란 절이 있으니, 영풍의 부석사나 서산의 부석사나, 무지한 소치로 그저 그런 평범한 절집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흔히 살아가면 마주친 사물이나, 사람들에게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마음속에 두고두고 잔잔하게 여운을 남겨주는 무엇인가를 간직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라 말해도 좋고, 속(俗)에 말하는 정이라 할 수도 있고, 끊지 못한 감정의 실타래가 줄줄이 이어져, 살아가면서 문득 문득 그리움으로 솟아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낡은 사진첩처럼 마음속에 간직되고 있는 .......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장암(天藏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 주변 풍광도 좋아서 단골 소풍지였다.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소풍을 갔던지, 지금도 고향집에 들러 혹시 천장암이란 이름만 들어도 노송이 어울어진 산길에 손에 손을 잡은 어린아이들이 불러주는 합창소리가 내 귀에 생생하게 메아리치곤 한다. 고학년으로 올라가서는 좀 먼 곳의 개심사로, 또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수덕사로 소풍지가 바뀌어, 천장암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절집이었으나, 천장암만큼 짙은 이미지로 내 마음속에 각인될 수는 없었다. 부석사는 바로 천장암과 같은 그런 절집이었다.



그 날 영주 부석사를 찾았을 때는 겨울의 끝자락, 마른 잎이 져 버린 삭막한 2월달의 풍경인데다가 평일이어서인지 , 부석사 입구 가게앞 종점에 내린 이는 두세 사람에 불과했고, 절을 찾아온 사람이 아닌 인근 주민인 것 같았다. 좁은 진입로 곁, 기념품을 파는 가게 앞에 큰집 마당같은 곳에서 차에서 내려, 다리를 건넜던 것 같다. 절집을 오르는 길은 남향으로 햇살이 밝아 눈이 대부분 녹아 있었다. 절까지는 까마득한 거리였다. 그래서 그것이 절의 입구란 생각보다는 그저 마을 들머리처럼 느껴졌었다. 더구나 길가로는 겨울을 지낸 사과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놓고 있는 과수원이었다. 할머니가 광주리에 펴놓고 사과를 팔고 있었다. 몇 알을 사서 배낭에 넣고, 옷에 문질어 베 물었다. 사과가 어쩌면 그렇게 달았던지. 집에까지 가지고 왔던 사과 몇알을 먹어보고는 그 후로 풍기 사과를 사려고 시장에서 찾아보아도 그 맛을 만날 수가 없었다.



절은 조용히 참선에 들어 있었다. 관광객도 스님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소나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만이 실경(實景)임을 알리는 듯한 깊은 삼매경에 빠져 있는 절집이었다. 그래서 함부로 다가서기조차 경외(敬畏)로운 적막감이 감돌았다.

쌓인 눈이 녹아내리다가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끔씩 철크덕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그 소리에 놀라는 고요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석사하면, 솔바람 스쳐가는 양지켠에 고드름이 녹아 떨어지는, 2월달 밝고 포근한 햇살 쏟아지는, 큰집 툇마루처럼 기억이 되곤한다.

무량수전앞 안양루 너머로 펼쳐진 첩첩한 산줄기들, 절집은 모든 정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만큼 높이 자리하고 있었다. 탁트인 정경이 답답한 심경을 풀어헤쳐, 중생의 번뇌를 털어 버리라는 계시를 주는 듯 했다.



오늘 부석사는 10여년전 버스를 타고 찾아왔던 절집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넓게 깎여진 주차장, 인공호수와 분수대, 초입부터 생경스러운 풍경이 전혀 다른 곳으로 잘못 찾아온 느낌이었다.

휴가철을 맞은 관광객들이 시장통을 방불케하며 북석였다. 하긴 나 자신도 승용차를 타고 와서 넓은 주차장이 없었다면 어디에 차를 놔둘 것인지, 나 혼자만 찾아와 옛날의 정취를 느끼겠다는 것은 도둑 심보가 아니겠는가?



나는 사찰이나 문화재에 대한 식견이 없어 미학적 평은 할 수가 없으나, 요즈음 들어서 고풍스런 절집이 불사(佛事) 과정에서 자꾸만 망가져 버리는 것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부처님의 석상만은, 탑만큼은 석공의 솜씨로 다듬어 줄 수는 없는 것인지 ....... 날카로운 각으로 돌을 잘라 기계의 날을 대어 조각한, 석등, 탑, 부처님의 석상은 수억년이 지나도 ,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으로 남을 문화재는 될 수 없을 것 같다.



고향가는 길에 수덕사앞을 지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제는 수덕사를 찾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찰앞의 운치 있던 자연석은 모두 사라지고, 소풍날에 아름다운 꽃으로 반겨주던 고목의 벚꽃 나무들도 거의 잘려나갔다. 기계로 잘 다듬어진 머릿돌을 세우고, 바닥을 깔고 계단을 만들고, 길은 옛날보다 좋아졌으나, 정감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사찰에 시주돈이 많이 들어온 탓인지.....

벚꽃이 일제의 잔재라서 없앴는지......



절은 대웅전만이 아닌 것 같다. 부처님의 중생제도와 무관한 것인지는 몰라도, 문화재로서 이미지와 느낌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사체에 이르기까지의 먼 외곽 지대부터 절집의 향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

산문(山門)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산문 주변의 어느 것도 훼손하여서는 안된다.



부석사의 주차장이 왜 이 자리야만 했을까. 이 주차장에서 2k 쯤 걷는 아랫동네 쯤이었다면, 이렇게 절집의 아랫도리를 발가 벗겨 놓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무언가 헛헛한 심정이다.



그러나

절집 마당은 연전히 포근하다.

솔바람소리,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부석사(浮石寺)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며,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이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 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 범종루(梵鐘樓), 안양문(安養門), 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알려진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부석사는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을 이야기인, 연기 설화(緣起說話)가 유명하다.
선묘는 의상대사가 당으로 유학을 가서 만난 아리따운 낭자였다. 의상이 장안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 문하에서 10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른 후 귀국하려고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스님이 탄 배는 벌써 수평선 뒤로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선묘는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 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물리쳤다.

조선조 숙종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아래 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이 없이 드나들어 뜬 돌임을 알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라 했고, 그 후 선묘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하여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전설이 있다.



부석(浮石)은 무량수전 서편에 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이 절을 세울 때는 내외 정세가 대단히 불안한 시기였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였다고는 하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 일부가 통일을 거부하고 전왕조의 국권 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고, 통일을 위해 손잡았던 당나라군사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철군할 생각을 않고 공주 땅과 평양에 도호부를 두고는,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에 대하여 학대가 극심하였다.

신라는 당군의 철군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결국은 이것이 화근이 되어 나 당 전쟁의 위기에 이르게 된다.
의상조사는 당나라가 신라를 치기 위한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는 당초 계획을 일년 앞당겨 귀국하여 문무왕께 고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무력으로서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부처님의 원력으로 국가 안보를 기원하도록 하기 위해 의상 조사로 하여금 호국 사찰을 세우고 화엄학 전교와 아울러 호국을 위해 부처님께 기원을 하게 하였다.
의상 조사가 귀국후 첫 번째로 이 부석사를 세우고 호국을 기원하였다. 무량수전에 모신 아미타 부처님은 동남 15도 각도로 정좌하였는데 이는 경주 월성궁을 향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으로 나당 전쟁은 신라가 승리를 하게 되고 당이 공주, 평양등에 두었던 도호부도 모두 철수하여 신라는 명실 공히 삼국 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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