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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잎새에 이는 바람 ( 손연자 )
날짜
04-01-25
등록자     하늘 조회수 18439
     
 

마사코의 질문 ) 중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 손연자 1.일본 후쿠오카 형무소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 청년 오십여 명이 주사를 맞으려고 시약실(약을 주거나 주사를 놓는 방) 앞에 쭉 늘어서 있습니다. 모두들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입니다. 번호가 앞선 시인은 병감(감옥 안에 있는 병실)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립니다. 온몸의 뼈가 다 드러나게 말랐지만 시인의 눈은 깊고 온화합니다. 형무소 근처 하카타 만의 파도 소리가 달려옵니다. 시인은 골똘히 파도 소리를 듣습니다. 유리창이 덜커덩 흔들리자 창 밖 멀리에 나무들이 으르르 가지를 떱니다. 아직 1월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바람은 겨울 바람입니다. 바람의 등을 나비가 훌쩍 탑니다. 나비를 등에 태운 바람은 병감 쪽으로 슬몃슬몃 다가갑니다. 간수가 출입문을 열고 나가는 사이, 나비는 안으로 들어갑니다. 나비는 연분홍빛 고운 날개를 파르르 떨며 얄따란 몸을 뒤척입니다. ´한겨울 나비라니!´ 시인이 황급히 손을 내밀어 나비를 맞이합니다. 나비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와 살포시 나래를 접습니다. 시인은 검지손가락으로 나비의 날개를 쓰다듬습니다. 보드랍습니다. 너무 보드라워서 호르르 말릴까 봐 시인은 쓰다듬기를 멈추고 그대신 나비를 들여다봅니다. 시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 나옵니다. 나비는, 한 장의 꽃이파리였습니다.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매화꽃 꽃이파리! ˝밖에선 봄이 오고 있구나.˝ 시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려 눈을 감습니다. 경성(서울)에서 두만강변 상삼봉역 2천2백40여 리. 다시 용정역 기찻길 2백 리. 고향 북간도가 보입니다. 산으로 둘어싸인 아늑한 큰 마을 명동이 보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선바위 삼 형제. 가끔씩 녹슨 화살이 발견되던 바위 뒤의 옛 산성. 가랑나무 우거진 기슭엔 풍금 소리 은은하던 교회당. 앞 강가 버들 숲 방천에 버들강아지가 바람에 일제히 허리를 굽힙니다. ´기와를 얹은 큰 대문 마당에는 자두나무가, 집 뒤쪽 좌우의 과수원에는 자두와 살구나무가, 봄이면 꽃들을 하얗게 피워 냈었지. 꿀벌들은 붕붕 날고, 봄새들은 비비뱃종 우짖고…´ 시인은 과수원 울타리로 둘러친 뽕나무 그늘에 앉아 봅니다.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오디를 따 먹던 시절이 거기에 있습니다. ´동쪽 쪽대문 밖 우물로 달려가 수십 길 우물물을 길어서는 오디물 범벅이 된 입을 씻었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소리치면 속에서 울리던 맑은 소리.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었지.´ 시인은 뽕나무 그늘에 누워 한가로운 구름을 봅니다. ´히이잉-´ 구름 위에서 어릴 적 당나귀가 웁니다. ´음머어.´ 구름 위에서 눈매가 어진 황소가 웁니다. 아버지의 삼베 적삼 걸치고 산으로 소를 몰던 기억이 어제인 듯 눈에 선합니다. ´저녁 무렵이면 어머니 손을 맞잡고 슬컹슬컹 콩맷돌을 돌렸었지. 두부가 익기를 기다리던 어린 동생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진정코 서러운 아우의 대답이다. ˝후우-.˝ 시인은 병감 안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그리움의 한숨을 쏟습니다. 겨울 바람이 병감의 창문을 흔듭니다. 시인은 폭설이 내리던 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노루와 멧돼지를 잡던 일을 떠올립니다.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대회 연습을 했던 일은 용정으로 이사한 은진 중학 2학년 때의 일입니다. 물사발이 마당으로 휙휙 날던 일도 생각납니다. 가라던 의과 대학은 안 가고 배고픈 문과를 간다고 아버지는 물사발을 내던지며 화를 내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진 여름 방학에 집에 내려와 외출을 할 때면 슬며시 대학 모자를 챙겨 주셨습니다. ´새벽 눈길을, 옷 두껍게 껴입고 벙거지 뒤집어쓰고 개가죽 버선을 신고 걸어다녔지.´ 시인은 성탄절 찬송가를 부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 코끝이 찡합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 시인은 마음 속으로 찬송가를 부릅니다. ˝이보게들.˝ 주사기에 약을 넣던 옥의(감옥의 죄수들을 치료하는 의사) 가 점잖게 죄수들을 부릅니다. 눈 감고 먼 고향을 쏘다니던 시인이 그 소리에 눈을 뜹니다. ˝생각해 보게. 어디 조선이 독립되겠나? 앞길이 창창한 머리 좋은 재주꾼들이 이런 헛고생을 하다니! 조선이 독립된다는 건 자네들 꿈이네. 어서 꿈들을 깨게.˝ 옥의는 딱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한 달 전, 간수의 인솔을 받아 병감으로 들어왔을 때도 옥의는 조선 사람 죄수들을 휙 둘러보며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 때도 옥의는 딱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나는 개업을 하고 있던 의사요. 군의관이 되어 전쟁터로 가기에는 나이가 많아서 대신 감옥에서 일할 의사로 징발되어 왔소. 자, 여러분 이건 아주 쉬운 계산 문제요. 암산을 해서 연필로 답을 쓰도록 하시오.˝ 옥의는 자기 소개를 하며 암산 용지를 두세 장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암산 용지에는 간단한 덧셈 뺄셈 문제가 수백 개 가량 나와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열심히 답을 써 내려갔습니다. 5분 가량 지나서였습니다. ˝그만!˝ 옥의가 답안지를 거두었습니다. ˝나도 의학을 배우다 여기로 끌려왔소. 그런데 이건 무엇 때문에 하는 거요?˝ 한 젊은 죄수가 당차게 물었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별다른 일이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소.˝ 옥의는 웃으면서 주사기를 꺼냈습니다. 죄수들은 무슨 주사며 무엇 때문에 맞는지도 모르면서 팔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그 뒤, 주사를 맞으러 올 때마다 옥의는 암산 용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젊은 죄수들의 암산 능력은 거의 반으로 떨어졌습니다. 일 주일이 지나면서부터 틀린 답투성이가 되어갔습니다. 몸들도 눈에 띄게 수척해졌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생체 실험을 당하고 있소. 우린 저놈들의 인간 모르모트(실험용 흰쥐)인 셈이오.˝ 옆에 있던 죄수가 창백한 얼굴로 시인에게 속삭였습니다. 주사를 맞은 이후로 이백오십여 명의 죄수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주사를 맞기 전인 지지난 해 예순네 명에 비하면 거의 네 배나 되는 주검이었습니다. ˝자, 그 다음!˝ 옥의가 재촉을 합니다. 차례가 된 시인은 잠자코 뼈만 남을 팔을 내밉니다. 10CC 정도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사액이 혈관으로 흘러듭니다.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시인은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시인은 다시 북 3사 108호, 사방이 꽉 막힌 독방으로 돌아옵니다. 지난 해 초여름 오후, 간수의 지시에 따라 얇고 푸른 이불을 받쳐 들고 그 위에 베개와 밥통 하나를 얹고 들어섰던 방입니다. 낮에도 십 촉짜리 알전구가 없으면 앞이 안 보이는 이 방은 누우면 발이 벽에 닿을 정도인 관 속 같은 방입니다. 간수가 쇠창살문을 열자 포르말린과 오물 냄새가 사정없이 코를 찌릅니다. 형무소로 온 지 일 년이 되어 가는 지금도 이 냄새는 몹시 역겹습니다. 시인은 나오려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구석에 놓인 간장통 모양의 나무변기를 외면합니다. ˝철거덩!˝ 등 뒤에서 쇠문이 잠깁니다. 아침 청소, 변기통 교환, 식사, 며칠 만에 한 번씩 하는 운동, 그리고 일감이 들어오고 나갈 때만 하루에 다섯 번 정도 열리는 쇠문이 저렇게 절벽 같은 소리로 닫힙니다. 간수의 발 소리가 멀어집니다. 밤이나 낮이나 켜 있는 십 촉짜리 알전구가 죽음처럼 어둡습니다. 시인은 초롱초롱 빛나던 고향의 별빛을 떠올립니다. ´… 별 하나의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그러나 어머님, 저는 이렇게 조롱에 갇힌 새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가만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그대로 둔 채 어두운 벽을 쾅쾅 두들깁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가죽만 남은 손이 터져 피가 납니다. 이틀 뒤, 날씨가 싸늘한데도 시인은 해골 행진을 하고 왔습니다. 발가벗은 죄수들이 수건 하나 달랑 들고 줄을 지어 목욕하러 가는 것을 여기서는 해골 행진이라고 부릅니다. ˝서둘러라.˝ 간수가 호령을 합니다.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이 뼛속을 후빕니다. 목욕을 끝내고 다시 방으로 들어서는데 방이 빙그르르 돌고 변기통이 우줄우줄 춤을 춥니다. 십 촉짜리 알전구가 눈부셔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간수가 투망을 짜라고 일감을 넣어 줍니다. 시인은 떨리는 손으로 명주실을 집어듭니다. 독방 감옥에서는 일을 하는 것도 형벌이고 일 없이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도 형벌입니다. 그 동안 시인은 손이 닳도록 풀을 묻혀 봉투를 붙였고 목장갑의 코를 꿰었고 이제는 명주실로 어망을 뜹니다. 시인은 얼어 터진 손으로 한 코 한 코 투망을 뜹니다. 어머니를 닮아 솜씨가 좋은 시인은 명주실 어망을 남보다 꼼꼼하게 잘 엮습니다. 그러느라 겨울 내복의 왼쪽 소매와 왼쪽 가슴은 닳고 닳아 헝겊의 올이 풀어지고 잔구멍이 뽕뽕 났습니다. 투망 한 코를 뜨면 고통스럽던 생각 하나가 엮어집니다. 시인은 간간이 손을 쉬고 눈을 감습니다. ˝주님, 어제도 오늘도 다 잊게 해 주십시오. 저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도 잊게 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이 죄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어 저들을 용서하게 하옵소서. 저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듯이 저들에게도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리고 간절히 원하옵건대 저들의 손아귀에서 우리 민족을 구해 주시옵소서.˝ 시인의 몸에 펄펄 열이 납니다. 다시 투망을 뜹니다. ˝1943년 7월 14일,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 교토 시 시모가모 경찰서에 유치 조사. 다음 해 3월 31일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징역 2년 선고.˝ 투망 안에서 소리가 소리를 지릅니다. ´너는 국체 변혁의 목적을 가지고 결사를 조직하려 했던 자다. 너는 그것을 지원하고 준비하고 실행하려 했던 자다.˝ ˝피고인 히라누마 도오츄으는 치안 유지법 제5조에 의거 2년 형에 처한다.˝ 겨우겨우 떠 가는 투망 안에서 검사와 판사가 호통을 칩니다. 시인은 몸서리를 칩니다. ˝푸른 강물에 사는 물고기들아, 너희는 이 투망에 한 마리도 잡히지 말거라.˝ 시인은 방금 뜬 투망을 풀어 버립니다. ˝뭣들 하고 있나? 오늘 할당량을 못 채우면 저녁밥은 없는 줄 알아라.˝ 간수가 쇳소리를 지릅니다. 시인은 좍좍 투망을 풉니다. 하루가 속절없이 지나갑니다. ˝소등.˝ 간수의 명령과 동시에 뎅거덩 감방의 불들이 꺼집니다. 시인은 고단한 몸을 뉘며 신음합니다. ´…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시인은 그 밤을 열에 들떠 꿈 속처럼 보냈습니다. 꿈 속에서 시인은 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시인은 ´기상´이라고 외치는 간수 소리에 무거운 눈을 뜹니다. 2월의 새벽에는 해가 없어 밖은 아직도 컴컴합니다. 그래도 간수는 5시 30분만 되면 어김없이 기상을 외칩니다. 시인은 기듯 일어나 세수를 하고 마룻바닥에 물걸레질을 합니다. 배설물이 담긴 변기통을 복도에 내놓으려는데 발이 휘청거립니다. 요즘 들어 변기통이 볏섬만큼 무겁습니다. ˝정좌!˝ 간수가 소리칩니다. 아침 청소 다음은 묵상입니다. 시인은 바르게 않으려 애쓰며 눈을 감습니다. 무수한 벌레들이 눈 속을 오갑니다. 벌레 두 마리가 점점 커지더니 시인을 욕하며 발길질합니다. 교토 다께다 아파트에 하숙방이 시인의 감은 눈에 나타납니다. 눈 속의 벌레 두 마리가 번갈아 소리칩니다. ´우린 특고(특별고등경찰)들, 사상 탄압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 조직의 형사들이다.´ ´너를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체포한다.´ ´나는 다만 조선의 젊은이로서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민족 의식의 각성과 문화를 지키는 일에 대해 얘기했을 뿐입니다. 나와 얘기했던 사람은 동갑내기 고종 사촌 형 송몽규와 몇몇 친구들뿐입니다.´ ´그게 죄가 되는 줄 너는 몰랐느냐?´ ´…….´ ´너는 언젠가 동생한테 이제는 조선말도 글도 못 쓰게 됐으니 곧 조선말 인쇄가 다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조선말로 된 것은 악보까지도 모두 사서 모으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어떻게 그런 것까지도!´ 정좌 중이던 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쥡니다. 벌레들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킬킬거립니다. ´우린 네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철저히 감시했다. 네가 살았던 다께다 하숙집에서도 몰래 엿듣고, 가모노오오하시 다리를 건너 다니던 도지샤 대학도 미행을 했다.´ ´…….´ ´야시장 노점에서 친구들과 참새고기를 먹을 때에도, 교토의 은각사와 상국사를 거닐 때에도, 비파호를 바라보며 네 민족을 생각하고 비탄에 잠길 때에도, 우린 널 감시했고 미행했고 낱낱이 기록했다.´ 시인이 귀를 막고 몸을 비틉니다. ´나는 말하고 싶은데 저들은 침묵하라 하네. 나는 노래하고 싶은데 저들은 하지 말라 하네. 서고 싶은데 앉으라 하고 잠자고 싶은데 일어나라 하고 아, 사랑하고 싶은데 죽으라 하네…….´ 소리가 시인을 부릅니다. 소리는 엄숙하게 외칩니다. ´너희는 노예이니라.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주인을 섬겨야 하는 노예이니라. 노예는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며 짐승이 아니되 짐승이니라. 무릎을 꿇어라. 머리를 숙여라. 기어라. 핥아라. 죽어라. 노예에겐 영혼이 없고 낙엽 같은 육신만 있을 뿐이니, 노예는 오줌이요 똥이요 그걸 먹고 사는 천한 벌레이니라. 그러나 그런 목숨조차도 주인의 소유이니라. 으하하하하!´ ˝무섭구나!˝ 시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시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쌉니다. 30분이 지났습니다. 간수 부장의 점검이 시작되었습니다. ˝번호!˝ 간수의 명령에 죄수들이 큰 소리로 번호를 말합니다. 이름은 없고 숫자만 있는 저 처량맞은 번호, 번호. 번호들이 형무소의 긴 복도에 메아리칩니다. 108호의 자물쇠가 덜커덕 열립니다. 시인은 모기만한 소리로 번호를 말합니다. 간수 부장이 힐긋 쳐다보고는 다음 방으로 갑니다. 점검이 끝나자 철문 아래쪽에 있는 조그마한 밥구멍 문이 열립니다. 꽁보리밥에 단무지 몇 쪽, 묽은 된장국 한 그릇이 쇠철문 안으로 들어옵니다. 하루 세 끼. 세 번. 세 마디. 시인의 말 상대자는 밥을 주는 사람뿐입니다. ˝고맙소.˝ 시인은 입술만 겨우 달싹여 들릴 듯 말 듯 말합니다. 시인은 가슴 속 어머니께 말합니다. ´어머니, 대동강 물로 끓인 국, 평안도 쌀로 지은 밥, 조선의 매운 고추장을 먹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구수한 조선의 된장국이 먹고 싶습니다.´ ´오냐, 아들아. 어서 거기서 나와 집으로 오렴.´ 어머니가 측은한 눈길로 바라봅니다. 시인은 밥을 뜨다가 맙니다. 점점 숟가락 들기가 힘에 부칩니다. 쇠문 중간에 있는 감시 구멍 문을 열고 간수가 들여다봅니다. 그러곤 습관처럼 등을 돌립니다. 열에 들뜬 시인이 헛소리를 합니다. ˝어머니, 여름에 독방형은 견디기 어려운 고행입니다. 딱딱한 마룻바닥에 앉아 열 두 시간 작업을 하면 팔다리, 온몸이 저립니다. 한여름의 무더위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힙니다. 어두운 감옥, 어두운 세상, 어두운 내일. 어머니 허락해 주십시오. 차라리 죽겠습니다.˝ ˝해환아, 여름이라니? 지금은 겨울이란다. 죽겠다니? 이제 아홉 달만 꾹 참으렴. 11월 30일이면 석방이야. 너는 자유다. 어서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리거라.˝ 어머니가 숨가쁘게 시인의 어릴 적 이름을 부릅니다. 2월에 들어서도 이름 모를 주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시인의 모습은 뼈에 가죽만 씌워 놓은 것처럼 변했습니다. 2월도 보름이나 지난 다음 날 한밤중입니다. ˝어어머니이!˝ 슬픈 짐승 같은 높은 외마디가 108호 쇠창살문을 뚫습니다. 복도에 드리워진 찬 달빛을 밟고서 간수가 저벅저벅 다가옵니다. ˝죽었구나! 참 얌전한 사람이었는데…….˝ 감시 구멍을 열어 보던 간수가 손목 시계를 봅니다. -1945년 2월 16일 금요일 오전 3시 36분 사망. 27세 2개월 간수는 수첩을 꺼내어 적습니다. 그러고는 사상범이 있다는 표시로 쇠창살문 옆에다 달아 놓았던 ´엄정(엄숙하고 바르게)´ 패찰을 뗍니다. 복도를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밀폐된, 어두운 방을 울립니다. 2. 아이와 시비 어느 일요일입니다. 여섯 살배기 남자 아이가 대학교 교정 안에 있는 시비(시를 써 놓은 비석) 앞에 서서 소리내어 시를 읽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아이는 방금 까만 돌 위에 내리닫이로 써 있는 시를 읽은 게 아주 대견합니다. 그래서 배를 한 번 쑤욱 내밉니다. 엄마한테 한글을 배우고 나서부터 아이는 글씨로 보이는 것은 뭐라도 큰 소리로 읽습니다. 대학교 근처에 사는 아이는 심심하면 곧잘 시비 앞으로 와서 놀곤 합니다. 아이는 하도 여러 번 이 시를 읽어서 이젠 외울 수도 있습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아이가 나머지 시를 다 읽고 났을 때입니다. ˝얘야!˝ 아주 가까이에서 웬 젊은 사람이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는 시비를 들여다보던 눈길을 소리나는 쪽으로 돌립니다. ˝이리로 오렴!˝ 그 사람은 벚꽃 그늘에 반쯤 가려진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옆자리를 눈짓으로 가리킵니다. 아이가 다가가자 그 사람이 말합니다. ˝난 저 시를 쓴 사람이란다.˝ ´화아!´ 아이는 시를 쓴 사람을 만난 게 하도 반가워서 입으로 바람 소리를 냅니다. 시인이 빙그레 웃습니다. 아이는 시인의 무릎에다 손을 얹고 삼촌한테 하듯 말하면서 슬쩍 제 몸을 기댑니다. ˝근데 아저씬 왜 머리를 빡빡 깎았어?˝ ˝그거언……, 아저씨인……, 죄인이었으니까.˝ 아이가 킬킬 웃다 말고 심각한 표정으로 팔에 기대었던 머리를 듭니다. ˝그럼 아저씬 나쁜 사람이야? 왜 죄인이 됐어?˝ ˝나도 내가 왜 죄인이 됐는지 몰라.˝ ˝모르는데도 죄인이야.˝ ˝형사들이 붙잡아 놓고 넌 죄인이다 그러면 다 죄인이 되는 때였어. 그 때는.˝ ˝에이, 그런 법이 어딨어.˝ 아이는 아저씨의 말이 엉터리 같아서 헤헤헤 웃습니다. 시인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슬프게 말합니다. ˝얘야, 어쨌든 아저씬 죄인이었단다.˝ ˝으응, 그래서 속상해서 이렇게 빼빼가 됐구나.˝ 아이가 시인의 수척한 얼굴을 어루만집니다. ˝주사를 맞아서 그래, 강제로.˝ ˝주사?˝ 주사라면 아이도 질색입니다. ˝아저씨도 주사 맞을 때 울었어?˝ ˝응, 울었어. 어렸을 때부터 아저씬 울보였거든. 정말 싫었어.˝ ˝그럼 도망가지.˝ ˝우리 죄수들은 도망을 못 가.˝ ˝왜?˝ ˝담이 너무 높아서. 방문도 쇠문이었고. 우린 죄인이었거든.˝ 아이가 안됐어 하며 말합니다. ˝그럼 과자처럼 납작한 사람이 돼서 아주아주 큰 새를 타고 가지.˝ ˝그래도 숨을 데가 없었어. 하늘도 땅도 바다도 다 빼앗겼었거든. 얘야, 미안하다. 우린 나라를 빼앗겼었단다.˝ 아이가 얼굴을 찡그립니다. 시인이 아이를 번쩍 안아 무릎에 앉힙니다. 꽃그늘이 출렁 흔들리더니 꽃잎들이 떨어져 흩어집니다. ˝꽃눈이구나.˝ ˝눈 아니야. 그냥 꽃이야.˝ 아이가 시인의 말을 고쳐 줍니다. 시인이 고개를 젖혀 벚꽃 무더기를 올려다봅니다. 꽃가지 틈새로 4월의 하늘이 파랗습니다. ˝아, 자유!˝ 시인은 목이 메어 말끝을 떱니다. ˝아저씨, 자유 갖고 싶어? 그럼 내가 줄까?˝ 아이가 주머니에 있던 스티커를 꺼냅니다. 스티커를 받아 든 시인은 머리 위에 하얀 비둘기를 이고 있는 소년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스티커 밑엔 ´자유의 용사 번개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시인의 눈에 눈물이 돕니다. ˝자유 받아서 슬퍼, 아저씨?˝ ˝아니, 기뻐.˝ ˝그럼, 울지 말고 웃어.˝ 아이가 작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 줍니다. 시인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이의 이마에다 살짝 입을 맞춥니다. 아이가 간지러웠는지 어깨를 한 옴큼 옴츠렸다 폅니다. ˝얘야, 이 자유는 네가 가지고 있어라. 그리고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라. 절대로!˝ ˝응, 알았어. 그럴게.˝ 아이는 선선히 손가락을 내걸고 시인과 약속 도장을 찍습니다. 아이가 시인의 무릎을 베고 눕더니 노래를 송송송 부릅니다. ˝죽는 날까지 룰루, 하늘을 우러러 랄라,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음음.˝ 시인이 희미하게 웃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룰루, 모든 죽어 가는 것을 랄라. 사랑해야지 음음.˝ 하! 아이가 하품을 합니다. 아이의 가슴을 시인이 토닥여 줍니다. 아이의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이내 쌕쌕 잠이 듭니다. 시인은 자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얼마 뒤, 아이가 반짝 눈을 뜹니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난 아이는 왠지 허전해서 이리저리를 둘러봅니다. 벤치가 없습니다. 시인 아저씨도 없습니다. 아이는 일어나 옷에 덮였던 꽃이불을 텁니다. 바람이 살랑살랑 푸른 잎새를 흔듭니다. 후루룩, 꽃눈이 쏟아집니다. ˝시인 아저씨, 안녕! 안녀엉!˝ 아이는 잎새에 이는 바람을 향해 손을 흔듭니다. 꽃가지 틈새로 푸른 하늘이 열렸다 닫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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